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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 - 풍극관 / 홍계희 - 레꾸이돈 / 서호수 -반휘익

원조 베트남 한류스타 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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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비쨩☆의 베트남사 (23) 1차 남북전쟁.

이 때문에라도 레조는 명에 사신을 보내 책봉받으려고는 했으나, 명은 츤! 츤! 츤! 뭐 그나마 성과(?)라면 1596년 베트남 사신 풍 칵 코안(Phung Khac Khoan, 馮克寬), 즉 풍극관과 조선의 이수광이 만나서 필담을 나누었다는 것이려나? 


앨런비님의 베트남사 연재 중에 이 이야기가 눈에 띄어 써봅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이라는 저작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죠. 
이 이수광은 한-베 관계사에 꽤나 재밌는 기록을 남겼는데..
내용인 즉슨...이렇습니다. 


이수광은 본관이 전주로 조선왕조의 왕족인 '전주 이씨' 즉, 종친입니다. 출신성분(?)도 좋은데다 실력도 좋았으니 벼슬길에 나선 후로도 잘 나갔지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전인 1590년에 명나라 사신으로 연경(북경)에 다녀왔는데, 선조가 대뜸 이수광에게 안남국(베트남) 사신의 복식, 제도, 풍속 등에 물어보았으나 아는게 없는 터라 답변을 못했습니다. <지봉유설>같은 저작으로 미루어보아 스스로가 본인의 지식에 자부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고, 주변에도 그런 평판이 있어 선조가 사신으로 다녀온 이수광에게 물어본게 아닌가 싶은데요. 이 때 이수광이 답변을 잘 하지 못했던 것이 좀 맺혔던가 봅니다. 

그로부터 7년후, 그러니까 1597년. 임진년에 왜적이 침탈해와 조선이 피폐해지고 정유년에 재침해와 정세가 불안할 적에 이수광은 다시 명나라 사신으로 연경(북경)에 출장을 가게 됩니다. 찬스가 온거죠. 거기다가 명나라에서 외국사신들을 모아다가 숙소를 배정해주었는데, 뜻밖에도 안남국(베트남)사신단 하고 같은 숙소를 잡아줍니다. 거기다 체류일은 50일. 대박난거죠. 지금처럼 외국에 대사관을 두고 외교관이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어쩌다가 사신으로 간다고 해도 안남국 사신을 만난다는 보장이 없는데, 50일 장기체류에 같은 숙소로 배정받은 것이니까, 이전에 선조로부터 받았던 부담을 해소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된 것입니다. 

< 풍극관 위키백과 >

거기서 만난 사람이 위에서 언급된 '풍극관'.

풍극관은 안남국(베트남)의 사신으로 막(莫)씨에게 당했던 레(黎, 여)조가 다시 발흥하여 막씨 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기 위한 사신이었습니다. 이수광의 묘사는 이렇습니다. '그는 작년 7월에 안남을 떠나 올해 8월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 후로도 숙소인 옥하관에 5개월이나 머물렀는데 사신의 성명은 풍극관이었다. 호는 의재(毅齋)이고 당시 나이는 70살이 넘었는데 겉모습이 매우 괴이하였다. 그는 이를 검게하고, 머리카락을 풀고, 넓은 소매의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치포로서 중같이 머리를 두르고 그 나머지의 절반을 뒤로 내렸다. 또 조회때만은 머리카락을 땋아서 건모같은 것을 쓰고, 복식을 갖춰입고 예궐하는 것이나 돌아와서는 귀찮은 듯이 곧장 벗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를 따라온 수행원들은 대부분 짧은 옷에 맨발로, 겨울이라고 하지만 고말이 없었다. 그리고 침상을 사용하오 음식을 하는 것은 중국인과 그리 다르지 않았으나 약간 불결하였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어느것이나 무늬가 없었다. 그들의 인상을 말하며 얼굴이 짧고 눈이 우묵하고 성질은 온순하였다. 그리고 검을 쓰는 것도 좋아하나 그 방법이 다른데 좀처럼 남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필담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 한자를 하는 사람은 얼마간 있었는데, 중국어를 하는 자는 한 사람 밖에 없고 그 나라의 한자는 자획이 달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문체가 어떠한지 보려고 시험삼아 장구를 만들어 보내었더니 금방 사신이 답변을 하였다. 그래서 여러차례 필담을 나누게 되었다.'

시로 화답하면서 서른넷의 젊은 조선국 사신과 일흔 노년의 안남국 사신의 기묘한 우정이 피어나는데...칠십노인의 반밖에 안된 젊은이에게 '대수필(大手筆)'라고 추켜세우질 않나 백선향, 지향 등 안남특산의 선물로 보내오고, 이수광은 소지하고 있던 조선의 필묵을 답례로 줍니다. 그리고 풍극관은 본인이 가지고 있던 '만수경하시집(萬壽慶賀詩集)'의 서문을 이수광 더러 써달라고 요청하니 이수광이 몇 번 사양하다가 간청에 못 이겨 서문(安南使臣萬壽慶賀詩集序, 안남사신만수성절경하시집서)을 써주는 등 오십여일동안 우의를 쌓게 되었고.

그런 이후 이수광은 다시 조선으로, 풍극관은 다시 안남으로 귀국하게 되는데....

<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도진의홍씨 , 출처: 뇌세척 >

정유년 왜침으로 사츠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으로 건너와 진주성을 함락하고 경남 일대를 누비며 조선인 포로를 잡았는데, 스무살의 선비 '조완벽'도 거기 끼어있었습니다. 다른 수 만의 조선인 포로들과 함게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간 조완벽은 다시 교토의 상인에게 팔려갑니다. 

< 스미노쿠라 료이 角倉了以 >

이 교토의 상인은 당대 일본의 거상으로 주요 불교사찰 건축사업 및 '교토 운하'등 거대 토목사업에 금융업까지 통달한 거대 재벌로 성장한 '스미노쿠라 료이'였습니다. 그는 해외 비지니스에도 발을 뻗히고자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문실력이토익점수가 높은 인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해외 무역에 뛰어든 스미노쿠라 료이는 비율빈(필리핀), 안남(베트남)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그렇게 조선의 선비(士) 조완벽은 상인(商)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완벽은 1604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안남국을 방문하게 되고,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 거기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어느날, 안남국(베트남)의 지방장관 정초(鄭剿)가 고관들을 초대한 자리에 조완벽도 초대합니다. 다들 조완벽이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후하게 대접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포로가 된 연유를 묻고, 왜란이 일어난 사실이 안다면서 동정해줍니다. 

그러다가 책 한 권을 꺼내면서 '이 책은 귀국의 이지봉(이수광)이 쓴 시인데, 이 시를 준 사신은 당신과 같은 고려인이니까 물론 알겠지요?' 라고 묻습니다. 이에 조완벽이 답하길,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포로가 되어 이수광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모릅니다'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그곳에 모인 안남국 사람들이 그럴리 없다(나....나의 조선은 그러치않아!)며 이를 의아하게 여기면서 탄식한 후...조완벽에게 책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한류드라마 열풍일적에 한국인이 베트남에 방문했는데, 뭇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혹시 이영애 알아요?' '장동건 알아요?' 라면서 친근하게 대해주고 밥까지 사주는 셈. 그런데 여기다 대고, '저기; 저는 드라마 방영할때 일본에서 유학하느라  못 봤는데요 =ㅅ=;' 뭐 이런식으로 이야기해서 베트남사람들 실망시키기;;

조완벽이 그 책을 살펴보니 고금의 명시 수백편이 실려있는데, 그 책 첫머리에 조선국 사신 이수광의 시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시는 모두 붉은 먹으로 비점(批點, 시가 잘되었다고 하는 표시)이 찍여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안남국 고관들이 칭찬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부분은 이렇습니다. 

山出異形饒象骨 (산은 이상한 형상으로 솟았으니 코끼리 뼈가 넉넉하고)
地蒸靈氣産龍香 (땅에선 신령한 기운이 피어오르니 용향을 생산하네)

실제로 안남국에 상산(象山)이 있는데, 조선선비가 이를 어찌 알고 지었는가 하면서 정말 절묘하도다 라면서 찬탄했다는 거죠.

조완벽이 이수광을 잘 알지 못함을 알게되었음에도 며칠 후 다시 초대하여 주연을 벌여 대접했다고 하니 조완벽이 이수광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지요. 안남국사람들은 그런 조완벽에게 '조선은 예의지국이므로 우리나라와 같은 나라'라며 위로합니다. 

당시 조완벽이 방문 곳은 교지(하노이) 근처 해안인데, 안남국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고 국자감 등을 설치하고 유교경전을 교육하는 유교국가였습니다. 당연히 공식문자도 한자였으니 조완벽의 필담이 통하는 것이었죠. 

그러고 나서 새로이 책을 꺼내 보여주며 '이 책은 귀국의 재상 이지봉이 쓴 책인데, 우리나라 유생들은 모두 외우고 있으니 당신도 보시오' 라고 건내주니 조완벽은 안남현지 비니지스 와중에 짬을 내어 시 몇 편을 베껴서 적었답니다. 그러고나서 학교에 유생들을 만나보니 정말로 유생들이 그 책을 지니고 암송하고 다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K-POP, 베트남 강타) 조완벽은 같은 조선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이수광의 문명(文名)을 멀리 떨어진 안남에서 알게 된 것이었죠. 

< 안토니오 꼬레아, 루벤스 >

그렇게 해외영업직으로 떠돌던 그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609년(임진왜란 종식 10년째)에 조선에서 '쇄환사'를 일본에 보낸 것이었죠. 여우길을 정사로 한 쇄환사 일행은 소문을 듣고 온 조완벽을 만났고, 조완벽이 현지사정에 밝음을 알고 쇄환업무를 돕도록 합니다. 그래서 쇄환사 일행은 조선인 포로 1418명을 데리고 귀국하게 되는데, 여기에 조완벽이 끼어있었지요. 

그래설라무네 천신만고끝에 고향땅을 밟은 조완벽이 그동안 겪은 생활을 줄줄 읊다보니 거기에서 '안남국에 떨친 이수광의 문명'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아 그걸 또 김윤안이라는 사람이 듣고 보니 정말 신통하기 짝이 없는 터라. 대뜸 한양길에 올라 이수광에 이 이야기를 전해주니, 이수광이가 또 대경. 그리하야 이수광이 스스로 이 이야기를 정리하여 본인의 저작인 <지봉유설>에 깨알같은 자기자랑질을 담게 된 것이었습니다그려.  

당대 조선에서도 꽤나 떠들썩하게 화제가 된 모양인지 조선왕조실록에도 해당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조 19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2월 26일(임자) 3번째기사
이조 판서 이수광의 졸기

이조 판서 이수광(李睟光)이 졸하였다.
수광의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인데, 약관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다. 사람들의 말이 “교유(交遊)를 일삼지 않고 전랑(銓郞)이 된 사람은 수광뿐이다.”고 하였다. 오랫동안 사액(詞掖)638) 에 있어 많은 사명(辭命)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가 중국에 사신갔을 때,안남(安南)·유구(琉球)·섬라(暹羅)의 사신들이 모두 그의 시문을 구해 보고 그 시를 자기들 나라에 유포시키기까지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던 자가 상선을 따라 교지(交趾)에 갔었는데, 교지인이 그의 시를 내 보이면서 “그대는 당신 나라 사람인 이지봉이란 이를 아는가?”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도 존중을 받았다.

머나먼 정글안남의 유생들 입장에서는 머나먼 조선의 선비가 안남의 지형에 대해 시로 읊은 걸을 두고 놀라워하고 칭송한 것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저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정을 받을 정도니 그게더 놀랍죠. 이야기가 퍼지자 조선에서의 이수광의 문명(文名)도 크게 올라갔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좀 안 뜨던 연예인이 일본에서 한류스타라고 뜨면서 한국에서 재평가받는 현상 -_-;)

* 문제의 시구를 이수광이 훗날 상고하여 '자치통감강목에 안남 코끼리가 나는 곳이 상산, 양비외전에 교지에 서룡뇌향을 올리니 늙은 나무의 옹이에서 생기는 선잠향과 같다고 되어있다고 하면서 이는 실로 우연히 맞은 것이었다'라고 하는데....모양새가 은근히 자기가 전부터 알고 있었음을 과시하는 거 같습니다. 히히;

애초에 안남유생들은 이수광에 대해 찬탄하고 있었으니 연경에서 사신들끼리 만나다보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었기도 하지만, 그게 또 이런 기막힌 인생역정의 스토리가 들어있어서 더 기기막히죠.  200년 후 조선 사신 서호수와 안남국 사신 반휘익이 이를 두고 '천고의 기이한 만남'이라고 서로 감탄하면서 문화교류를 통해 양국의 우의를 다졌다고 합니다.